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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갈치의 은빛 유려한 칼춤을 보아요[조수일 시집]
2025-11-14 23:02:48
정세영
조회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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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갈치의 은빛 유려한 칼춤을 보아요

발제자: 정세영

 

1부 돋는다.

[먹갈치]

야행성이었다

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

대낮엔 모래 속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 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

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 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 붙었다

어둠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 북항의 밤은 늘 머리서 찬란하였다

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

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 자신의 바다에서

단 한 번도 刀漁(도어)가 되어본적이 없는 아버지,

갈라 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

마지막 실존이었던 銀粉(은분)마저 다 털려 유영의 꿈을 접었던

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게워 내느라 갑판 위가 흥건했다

짠물을 다 마시고도 채우지 못한 허기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좇는 허영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갈치 떼

가쁜 숨 몰아 쉬며

눈먼 만삭의 어둠 속에서 습관처럼

살점 저며 주고 뼈만 남은 먹갈치 한 마리,

또 한 번 서툰 몸짓으로 비상을 꿈꾼다

 

2부 고이다.

[고이다]

한 번쯤 고인다면 그게 당신이면 좋겠다고,

 

터널을 지나자 희미한 맥박처럼 들려오는 소리

시들었던 귀가 열린다

산은 어둠을 입고 잠이 들었는지 고요하고

몸빛 검은 양쪽 산을 끼고 얼마를 달렸을까

다시 변주곡처럼 들려 나는

울창한 개굴개굴

각자의 슬픔인 듯,

종족의 슬픔인 듯,

밥물처럼 들끓어

깜깜한 여름밤을 다 떠메고 갈 듯

맹렬한 저 그 악한 이마에 고인 단단한 어둠이 다 지워진다

 

늘 둥근 고요인 당신에게 가닿고 싶었던,

숨겨지지 않아 안달하는 한나절 그리움 같은 모습은 없고

열망만을 밤하늘 가득 쏘아 올리는 밀집에

발목이 묶인 듯 차를 세우고 논둑에 기대 긴 당신을 듣는다

희부연 무논 가득 얼비추는 가로등만 졸린 듯 껌뻑이고

시름에 잠긴 먼 하늘도 당신도, 말이없다.

 

3부 논하다.

[속눈썹 줍는 여자]

아무르강 기슭에서 허릴 굽혀 속눈썹을 줍네

마른 검불 같은 속눈썹

별빛 내리는 강 언저리는 희끗했고 눅눅했네

입 없는 트리코틸로 마니아는

밤마다 갉아 대는 생쥐들의 큰 입이었네

사각사각, 밟아오는 포식의 소리들

아침이면 헐거워진 민둥산 위로

동전만 한 보름달이 떠오르곤 했네

무한 이식을 꿈꾸는 검은 일탈은 늘 직선이었네

성긴 밤의 둘레를 걸어 나오느라 내 몸이 떨군 문양들

산란한느 뭇별들, 얽혀듦을 풀어낼 공식은 어디에도 없었네

갓 흘린 따스한 울음을 접고

물 주름 진 외벽으로 가는 쓸쓸한 귀소,

갈잎들 허릴 꺾고 아무르강 잔별들 귀가를 서두르네

 

4부 스미다.

[플라비아]

나는 아침 양송이수프 같은 엄마로

풀꽃 같은 딸로 살았으나

그는 그냥 플라비아였습니다

 

한 줄 수시억로도 불린 적 없는 플라비아

 

별도 뜨지 않는 뿌연 밤에는

지구 반대편 독방에 누운 그와

두 개의 종이컵을 잇대 만든

고대의 방법으로 교신을 했습니다

눈요깃거리로 교신을 했습니다

홀로 잠들고 눈 뜨는

혼잠이 더 쓰라리다며 울먹이곤 했습니다

 

지금쯤 주름투성이 익살스러운 긴 코를 말아쥐며

싱싱한 적 없는 나팔 귀를 펄럭이며

사바나 초지대 푸른 아기별로 떴을까요

알프스와 피레네산맥을 넘어

진군한 위용스러운 종족들과 합류도 했을까요

평생을 종종거려도 면할 길 없는

열 평 남짓 단칸방이 우리의 공통분모였습니다

 

김 오르는 목욕물을 받아

얇은 슬픔처럼 말린 장미꽃잎 몇 띄우고

숲 향기 나풀대는 양송이수프를 한 솥 가득 끓입니다

 

갠 날 없이 뿌옇게 살다 간

나의 소울 플라비아

 

우리는 마흔셋이었습니다

 

느낀점: 이 시집은 먹갈치의 은빛처럼 세밀한 이미지와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통해,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마음의 고요한 상처와 애정을 잔잔하게 드러내며, 읽는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시인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순간들을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감정의 결을 조용히 길어 올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읽다 보면 삶이 거칠고 버거울 때에도 여전히 빛나는 조각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고, 사소한 것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시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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