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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중력 (강연은 시집)
2025-11-11 14:32:43
백정은전도사
조회수   13

 

강영은시집_그리운중력.png

 

 

1. 그리운 중력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는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지막 남은 눈사람처럼 눈 감고 귀 닫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기다리네.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 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가 어디든 다녀가시라.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

나,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네.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꽃으로 피네.

 

 

2. 눈물은 공평하다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눈물 흘렸다.

땀으로 얼룩진 표정을 닦는 척, 수건에 감정을 파묻고 꾹꾹,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눌렀다.

양팔을 높이 쳐든 승자는 메달을 가져갔지만 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 메달은 있었다.

시간이라는 메달! 승부는 다만 순간 속에 녹여낸 사물일 뿐

딱딱한 기쁨을 목에 걸었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물컹한 슬픔을 손에 쥐었다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안다. 그 공평함이 세상을 걷게 한다는 것을

흐르지 않는 시간 있어 눈물이 한 생을 완성하는 그때 이슬처럼 영글게 하는

그 공평함이 신의 은총이라는 것을 먼 길 걸어온 당신과 나는 안다.

 

 

3. 지중해

너는 푸르고 깊은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진다. 기념품 가게에 걸린 나자르 본주우 목걸이처럼

악마의 눈동자, 천사의 눈동자를 지닌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고 싶은 눈동자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 너는 내가 아는 인간의 눈동자로 다가온다.

그럴 때 너는 내 속에 있지 않다. 돌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 너에게 무릎 꿇은 이미지 속에 있다.

너는 이따금 무표정한 얼굴과 둥근 팔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놓아둔다. 아교로 때운 조각상처럼

해변에 밀려든 널빤지는 흠집 난 나를 끌어안는다. 얼마나 많은 나를 운반한 거니?

네가 왕복한 별빛만큼 나를 비추는 눈물은 없다. 바다에서 사막으로, 다시 바다로,

이토록 멀리 왔으니, 수평선 너머로 가자.

세계를 펼친 지도 위에서 너는 한숨 쉬며 내 이마 위에 닿았다가 떠난다.

달 속에 있는 사막을 보면 네가 그리워진다.

 

 

[소감문]

시를 읽는 동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모두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시는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 그리고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중에서도  '그리운 중력'에서는 자아를 소멸시키고, '눈물은 공평하다'에서는 외적 성과를 포기하며, '지중해'에서는 타자의 거대함을 인정하며,

이 모든 고독과 희생의 여정은 결국 시간의 은총, 그리고 대가 없는 사랑을 통한 영원한 합일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귀결되는 듯 하다.

개인의 생각과 마음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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